[4막 9부] ‘헌법적 독립성’이라는 방패와 견제 없는 권력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

 19세기 영국의 역사가 액턴 경(Lord Acton)이 남긴 이 유명한 격언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얼마나 위험한 괴물로 변할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가장 완벽한 문장입니다. 그렇다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그리고 가장 완벽하게 견제받지 않는 절대 권력은 과연 누구일까요? 제왕적 권력을 가졌다는 대통령일까요? 입법권을 독점한 국회일까요? 아닙니다. 대통령도 탄핵의 대상이 되고 국회의원도 선거로 심판받지만, 대한민국에는 그 누구의 통제도, 감사도, 심판도 받지 않는 완벽한 성역이 존재합니다. 바로 대한민국 선거관리위원회입니다.

 지난 1막부터 8막까지 우리가 추적해 온 선관위의 붕괴 과정은 참담함 그 자체였습니다. 수만 명의 유권자를 쓰레기봉투 옆에 세워둔 ‘소쿠리 투표’ 참사(5부), 북한 정찰총국의 해킹 공격을 방치해 국가 안보를 위협한 보안 불감증(6부), 전·현직 고위 간부들이 자녀들에게 신의 직장을 상속한 ‘아빠 찬스’ 채용 비리(7부), 그리고 이 모든 범죄를 덮어버린 맹탕 셀프 감사와 꼬리 자르기(8부)까지. 사기업이었다면 당장 기업이 공중분해 되고 수뇌부가 구속되었을 초대형 스캔들이 연이어  터졌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선관위는 단 하나의 마법 같은 방패를 꺼내 들며 모든 위기를 유유히 빠져나갔습니다.

“우리는 헌법상 독립기관이다. 고로, 외부의 간섭과 통제를 거부한다.”

 독자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의 참상을 딛고, 선조들이 피 흘려 쟁취했던 ‘독립된 선거 기구’의 진정한 의미가 이런 것이었습니까? 권력의 개입을 막기 위해 헌법이 부여한 ‘성스러운 방패’가, 어쩌다 자신들의 무능과 부패를 가리는 ‘철제 방음벽’으로 전락해 버린 것일까요?  9부에서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독립성’과 투명한 행정을 위한 ‘견제’ 사이의 딜레마를 심층적으로 파헤칩니다. 감사원의 직무 감찰을 헌법 위반이라며 정면으로 거부했던 사태를 중심으로, 헌법의 그늘에 숨어 ‘견제 없는 권력’을 향유하는 선관위의 기만적인 논리를 철저히 해부합니다.

“우리는 감사받지 않겠다”, 감사원과의 정면충돌

‘견제 없는 권력’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뻔뻔한 종착지는 바로 2023년에 벌어진 ‘선관위와 감사원의 정면충돌 사태’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7~8부에서 다루었듯, 선관위 수뇌부의 ‘아빠 찬스’ 특혜 채용 의혹이 터지고 선관위의 자체 감사가 ‘맹탕 면죄부’로 끝날 조짐이 보이자, 국민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에 국가 최고 감사 기구인 감사원이 칼을 빼 들었습니다. 국가 공무원의 채용 비리는 명백한 부패 행위이며 행정 질서를 파괴하는 중대 범죄이므로, 감사원이 나서서 선관위에 대한 대대적인 ‘직무 감찰’을 실시하겠다고 전격 통보한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조치였습니다. 국가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 인사권을 남용했다면 당연히 외부 감사를 받는 것이 민주 국가의 기본 원리입니다. 하지만 선관위의 반응은 상식을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곧바로 긴급 위원회 회의를 열고 만장일치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감사 거부의 명분: 선관위는 헌법 제114조에 따라 설치된 독립기관이다. 헌법 제97조에 따른 감사원의 직무 감찰 대상은 '행정부'에 한정되므로, 행정부 소속이 아닌 헌법기관(선관위)은 감사원의 감찰 대상이 될 수 없다.
선거 관리의 중립성 훼손 우려: 만약 외부 기관인 감사원이 선관위의 직무를 감찰하게 되면, 향후 선거 관리의 중립성과 독립성이 심각하게 침해받을 수 있는 나쁜 선례가 된다.

 이 발표는 즉각 거센 후폭풍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선관위가 내세운 논리는 언뜻 보면 헌법 조문을 근거로 한 합법적 주장처럼 보이지만, 법조계와 행정학계의 전문가들은 이를 ‘지독한 궤변이자 아전인수 격 법리 해석’이라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감사원법 제24조 제1항 제3호는 직무 감찰의 예외 대상으로 ‘국회, 법원, 헌법재판소’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선관위는 법률상 직무 감찰 제외 대상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관위는 “헌법 조문의 취지상 우리는 빼야 한다”며 법률을 무시하는 오만함을 보였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들의 ‘논리적 비약’입니다. 국민이 요구한 감사는 “어느 정당에 유리하게 선거법을 해석했는가?” 혹은 “투표소 관리를 왜 그렇게 했는가?”라는 ‘선거 관리 고유 업무’에 대한 개입이 아니었습니다. “왜 너희 자식들을 불법적으로 공무원으로 뽑았는가?”라는 ‘일반 행정 및 인사 비리’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도대체 직원 자녀를 불법 채용하는 것을 조사하는 일이, 선거 관리의 중립성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범죄자가 경찰의 압수수색 영장 앞에서 “나를 수사하는 것은 나의 인권을 침해하는 나쁜 선례가 된다”며 문을 열어주지 않는 꼴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부패를 감추기 위해  ‘민주주의와 선거 중립’이라는 거룩한 단어를 볼모로 삼은 이 행태는, 선관위가 헌법 정신을 얼마나 자의적으로, 그리고 악의적으로 소모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여론의 거센 압박과 국회의 국정조사 요구 등 전방위적인 압력이 가해지자, 선관위는 마지못해 “특혜 채용 문제에 한해서만 부분적으로 감사를 수용하겠다”며 한발 물러섰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감사원의 직무 감찰 권한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단서를 달며 자존심을 세웠습니다. 반성 없는 조건부 수용. 이것이 바로 통제받지 않는 권력이 국민을 대하는 오만한 방식이었습니다.

민주주의의 수호자인가, 헌법 위의 특권층인가

 감사원 사태를 통해 우리는 선관위가 주장하는 ‘독립성’의 본질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기관의 독립성은 과연 모든 책임을 면제해 주는 ‘만능 방탄복’일까요?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 기관에 독립성을 부여하는 이유는 ‘권력의 분립과 견제’를 위해서입니다. 법관의 독립(사법부)은 권력자의 외압 없이 헌법과 법률,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재판하라는 뜻입니다. 선관위의 독립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처럼 내무부(행정부)가 선거판을 쥐고 흔들며 개표 조작을 일삼는 것을 막기 위해, 대통령이나 국회의 눈치를 보지 말고 ‘엄정하게 선거의 룰(Rule)을 집행하라’는 기능적 권한을 준 것입니다.

 이를 학술적인 용어로 ‘직무의 독립성(Functional Independence)’이라고 합니다. 선거 관련 법령을 유권해석하고, 불법 선거 운동을 단속하고, 투·개표를 관리하는 일련의 과정에서는 누구의 간섭도 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선관위는 이 ‘직무의 독립성’을 행정과 인사, 예산의 투명성마저 면제받는 ‘기관의 절대적 불가침성’으로 교묘하게 치환해 버렸습니다. 

다른 헌법기관들과 비교해 보면 선관위의 주장이 얼마나 비상식적인지 더욱 뚜렷해집니다.

사법부(법원)의 예: 법관은 재판에 있어서 완벽한 독립성을 보장받습니다. 대통령도 대법원장의 판결에 이래라저래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법원행정처 소속 공무원들이 국가 예산을 횡령하거나 인사 비리를 저지른다면? 당연히 감사원의 회계 감사를 받고,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됩니다. '재판의 독립'이 '행정 비리의 면책'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헌법재판소의 예: 헌법재판소 역시 독립된 헌법기관이지만, 행정적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외부 감사를 수용하거나 내부 통제 기구를 극도로 엄격하게 운용하며 사회적 감시에 귀를 기울입니다.

오직 선관위만이 “우리의 인사와 행정을 들여다보는 것은 곧 선거를 간섭하는 것”이라는 해괴한 삼단논법을 고집하며 갈라파고스 섬의 담장을 더 높이 쌓아 올렸습니다. 이 담장 안에서 선관위 직원들은 헌법기관이라는 엘리트 의식에 취해 서서히‘특권층’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국가 안보보다 기관의 체면이 우선: 국정원이 "북한 해커가 당신들 전산망을 털어가고 있다"고 경고해도,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며 문전박대했습니다.
투명성보다 기득권 보호가 우선: 자신들의 밥그릇인 채용 비리가 들통나도, "우리끼리 자체 감사하겠다"며 외부의 메스를 거부했습니다.
공정성보다 윗선의 심기 경호가 우선: 자신들의 밥그릇인 채용 비리가 들통나도, "우리끼리 자체 감사하겠다"며 외부의 메스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선관위가 휘두르는 ‘독립성’이라는 칼날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외부 권력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하는 ‘국민과 합리적 감시 시스템’을 향해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창설된 수호자가 스스로 헌법 위에 군림하는 특권층이 되어버린 현실. 견제받지 않는 조직의 내부 고름이 썩어 문드러져 결국 선거라는 국가의 근간 시스템마저 위태롭게 만들고 있는 이 모순. 우리는 이 기형적인 딜레마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투잡’ 위원장과 제왕적 사무총장, 견제 불능의 기형적 구조

 선관위가 외부의 감시(감사원, 국회 등)를 그토록 쉽게 튕겨낼 수 있었던 이면에는, 그들의 오만함을 가능하게 만든 ‘기형적인 내부 지배구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흔히 기관의 부패를 막으려면 강력한 내부 통제라도 작동해야 하지만, 선관위는 내부 견제마저 완벽하게 거세된 조직입니다. 그 중심에는 ‘비상임 대법관 위원장’‘제왕적 사무총장’이라는 기이한 권력 분점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은 관례상 현직 대법관이 겸임합니다. 헌법기관으로서의 권위와 정치적 중립성을 상징적으로 담보하기 위해 사법부의 최고위 법관을 수장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취지는 훌륭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의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손님'에 불과한 위원장: 대법관은 본업인 재판 업무만으로도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해야 합니다. 따라서 선관위 위원장은 평상시에는 일주일에 단 하루, 혹은 한 달에 몇 번 회의 때만 과천 선관위 청사로 출근하는 '투잡(Two-job)' 상태가 됩니다. 조직의 수장이 3,000명에 달하는 방대한 조직의 실무, 인사, 예산의 내밀한 흑막을 파악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위원장은 그저 중요한 결재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는 상징적인 '얼굴마담'이자, 외풍을 막아주는 '명분'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견제 없는 실세, 사무총장의 철권통치: 수장이 자리를 비운 거대한 성을 통치하는 것은 장관급 예우를 받는 '사무총장'입니다. 9급이나 7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선관위 내부에서만 수십 년을 뼈가 굵은 내부 승진자가 주로 이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들은 인사권과 예산 편성권, 지방 선관위 통제권 등 모든 실권을 양손에 쥐고 절대 군주로 군림합니다. 7부에서 다룬 '아빠 찬스' 채용 비리의 주범들이 모두 사무총장, 사무차장 출신이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자신을 통제할 상전(위원장)은 조직 물정을 모르고, 아래로는 철저한 상명하복의 기수 문화가 지배하고 있으니, 그들에게 선관위는 완벽한 '사유지'였던 셈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선관위를 견제해야 할 입법부, 즉 국회의 침묵과 방조입니다. 대한민국의 국회의원들은 선관위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집니다. 선관위가 정치인들의 생명줄인 ‘선거법 위반 여부’와 ‘정치자금의 합법성’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유권해석 권한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거를 앞두고 현수막 문구 하나, 후원금 영수증 한 장 처리하는 것까지 선관위의 눈치를 봐야 하는 정치인들이, 선관위의 내부 비리를 매섭게 파헤치고 조직 축소나 예산 삭감을 주장하기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보다 어렵습니다.

결국, 조직의 무지(비상임 위원장) + 실세의 권력 독점(사무총장) + 감시자의 눈치 보기(국회의 방조)라는 이 완벽한 트라이앵글이 헌법적 독립성이라는 방패 뒤에서 선관위를 ‘괴물’로 키워낸 구조적 자양분이었습니다.

독립성은 목적이 아니다, ‘투명성’과의 뼈아픈 괴리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행정학계와 법조계에서는 선관위가 그토록 숭배하는 ‘독립성’의 개념 자체를 해체하고 재정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선관위의 가장 큰 착각은 ‘독립성’ 그 자체를 기관이 존재하는 ‘목적’이자 특권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국가 기관의 존재 목적은 단 하나, ‘주권자인 국민을 위한 봉사’입니다. 선관위의 목적은 ‘공정하고 신뢰받는 선거 관리’이며, 독립성은 권력의 외압을 막아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쥐여준 ‘수단’에 불과합니다.

수단이 목적을 집어삼킬 때, 국가는 위기에 빠집니다. 선관위는 그 수단을 지키겠다며 다음과 같은 최악의 패착을 두었습니다.

투명성의 거세: 선거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투명성입니다. 누구나 과정을 지켜볼 수 있고, 문제가 생기면 즉각 해부하여 검증할 수 있어야 결과에 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관위는 "독립성을 지켜야 하니 서버(소스 코드)를 보여줄 수 없다", "독립성을 지켜야 하니 채용 과정을 감사받을 수 없다"며 투명성의 문을 겹겹이 닫아버렸습니다.
신뢰의 붕괴: '빛(투명성)'이 들어오지 않는 곳에는 반드시 곰팡이가 핍니다. 국민은 닫힌 문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4부에서 살펴본 수많은 '부정선거 의혹'은, 사실 투표지 분류기라는 기계 자체의 결함이라기보다는 그 기계를 운용하면서 절대로 내부를 보여주지 않는 선관위의 '불투명성'이 키워낸 괴물입니다.

영국의 선거관리위원회(Electoral Commission)나 독일의 선거 관리 기구들을 살펴보면 우리의 현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들 역시 선거 관리의 독립성을 엄격히 보장받지만, 조직의 행정, 예산, 인사 문제에 대해서는 의회와 외부 감사 기구의 철저하고도 투명한 통제를 받습니다. “선거 사무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조직 운영의 뼈대까지 샅샅이 감시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독립성을 유지하려면 그만큼 국민에게 ‘우리는 깨끗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할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선관위는 증명의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했습니다. “우리는 헌법기관이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믿어라. 의심하는 너희가 민주주의를 흔드는 것이다.” 이 오만한 엘리트주의는 결국 선관위를 1960년대 3.15 부정선거를 막기 위해 탄생했던 ‘민주주의의 파수꾼’에서, 2020년대 국민의 불신을 먹고 자라는 ‘민주주의의 골칫거리’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성역의 담장을 허물지 않으면, 다음 선거는 없다

9부를 통해 우리는 선관위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헌법적 독립성’의 실체와, 그 방패 뒤에 숨겨진 견제 없는 권력의 참담한 민낯을 확인했습니다. 감사원의 정당한 직무 감찰을 헌법 위반이라며 밀어내는 적반하장. 대법관 위원장이라는 허수아비 뒤에서 제왕적 권력을 휘두른 수뇌부들. 그리고 선거법의 칼날이 두려워 눈치만 보는 정치권까지. 대한민국 선관위는 삼권분립의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지 않는 완벽한 무풍지대, 즉 ‘민주주의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냉정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현재의 대한민국 선관위는 스스로를 개혁할 의지도, 능력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문제가 터질 때마다 법전 뒤에 숨어 “독립성 훼손”만을 앵무새처럼 외치며, 소나기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대로 이 거대한 ‘갈라파고스 섬’을 방치한다면, 다가오는 굵직한 선거들에서 또다시 투표함 관리가 마비되고, 해커들이 전산망을 유린하며, 패배한 진영이 개표 결과를 결코 승복하지 않는 ‘국가적 대혼란’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을 믿지 못하는 경기는 필연적으로 폭동으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해답은 외부로부터의 강제적인 메스, 즉 ‘제도적 대수술’뿐입니다. 성역의 담장을 부수고 그들을 광장으로 끌어내어, 민주적 통제 아래 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거대하고 썩은 조직을 어떻게 다시 민주주의의 정원사로 거듭나게 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사람 몇 명을 바꾸고 사과문을 발표하는 수준이 아니라, 조직의 뼈대를 완전히 다시 세우는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합니다.

이 길고 처절했던 10부작 칼럼의 마지막 장. 다음 10부에서는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고 대한민국 선관위를 정상화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강력한 대안들을 제시합니다. 외부 통제 기구의 신설, 인사권의 완전한 개방, 그리고 선거 관리 투명성 확보를 위한 법적·제도적 개혁 방안까지.

무너진 민주주의의 성전(聖殿)을 다시 짓기 위한 최후의 청사진.

(10부: 뼈를 깎는 개혁, 선관위는 어떻게 거듭나야 하는가? – 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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