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판이 유니폼을 입고 뛴다면?
현대 축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판독 시스템이 VAR 시스템입니다. 현대 축구에서 오프사이드는 경기에 중요한 규칙이고, 단 밀리미터의 차이로도 경기의 승패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만큼 현대 축구에 도입된 VAR 시스템은 정확한 판독 결과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만약 주심이 A팀 선수가 반칙을 하면 “경기의 흐름”이라며 넘어가고, B팀 선수가 똑같은 행동을 하면 가차 없이 옐로카드를 꺼내 든다면 어떻게 될까요? 관중석에서는 주심에게 야유가 터질 것입니다. 이때 관중이 느끼는 감정은 ‘불공정’을 넘어선 ‘분노’입니다. 아무리 좋은 기계가 있어도, 그 기계를 운용하고 규칙을 적용하는 ‘해석의 권한’이 오염되면 경기는 승부 조작이나 다름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선거관리위원회가 마주한 비극이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2부에서 살펴보았듯, 선관위는 세계 최고 수준의 투·개표 시스템(하드웨어)을 갖췄습니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 특히 최근 몇 번의 대선과 총선을 거치며 선관위의 ‘유권해석(소프트웨어)’ 기능은 심각한 오류를 일으켰습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국민은 이제 선관위의 결정을 법리적 판단이 아닌, 정치적 셈법의 결과로 받아들입니다. 정권이 누구냐에 따라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춤을 추고, 표현의 자유가 선거법이라는 칼날 아래 선별적으로 난도질당하는 현실. 3부에서는 선관위가 스스로 ‘헌법기관’의 권위를 내려놓고 ‘정치 플레이어’가 되었다는 비판의 근원을 추적합니다. 공정해야 할 심판이 어떻게 특정 진영의 방패막이가 되었는지, 그 ‘기울어진 운동장’의 실체를 살펴보겠습니다.

‘내로남불’의 공식화, 유권해석의 타락
선거 때마다 거리에는 수많은 현수막이 나부낍니다. 유권자와 시민단체의 정치적 의사 표현은 민주주의의 기본권입니다. 하지만 선관위는 공직선거법 제90조(시설물 설치 등의 금지)를 이용해 국민의 표현의 자유를 본인들의 입맛대로 재단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은 지난 제20대 대통령 선거와 2021년 재보궐선거 과정에서 불거진, ‘내로남불’ 현수막 불허 사태입니다. 당시 시민단체들은 정부와 여당의 실정을 비판하기 위해 “내로남불” “무능” “위선”과 같은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게시하려 했습니다.
어느 누가 봐도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비판 용어들입니다. 어느 특정 정당 또는 후보자의 이름은 단 한 글자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관위는 이 현수막들의 게시를 불허했습니다. 그들이 내세운 논리는 기가 막혔습니다.
“일반 유권자가 보기에 해당 문구는 특정 정당(당시 여당)을 쉽게 유추할 수 있으므로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선관위가 불허한 현수막 문구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코미디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선관위가 공식적으로 “내로남불, 위선, 무능 = 정부와 여당의 특징”이라고 인정한 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야당과 언론은 “정부의 무능을 무능이라 부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홍길동전이냐”며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잣대가 ‘이중적’으로 적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여당에 불리한 문구는 “특정 정당 유추 가능”이라는 이유로 칼같이 막았으면서, 반대 진영을 공격하거나 친정부적인 메시지는 상대적으로 관대하게 허용했다는 의혹이 쏟아졌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아래와 같습니다.
- ‘친일 청산’은 합법, ‘위선’은 불법?: 선관위는 “친일 청산을 하자”는 문구는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야당이 ‘친일 프레임’으로 공격받던 상황임에도, 이는 “특정 정당을 반대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논리를 댔습니다.
- TBS 캠페인 논란: “일(1)합시다”라는 TBS의 캠페인은 기호 1번(당시 여당)을 연상시킨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제재받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선관위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자신들에 입맛에 맞게 변화하는 잣대를 들이미는 행위들은 그들이 과연 가장 공정해야 할 민주주의에 심판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기에 충분했습니다. 국민들은 “도대체 기준이 뭐냐”고 선관위에게 항의했지만, 선관위는 “종합적인 상황을 고려한 판단”이라는 모호한 답변만 되풀이했습니다. 이는 국민들의 피로 쌓아올린 민주주의에 근간인 투표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확보해야 하는 선관위가 정권의 심기 경호실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자초한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기울어진 저울추, 편향된 인적 구성의 비극
그렇다면 왜 이런 편파적인 해석이 나오게 되었을까요? 실무 직원들의 능력이 부족해서일까요? 아닙니다. 문제는 머리, 즉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인적 구성에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선관위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기 위해 위원 9명을 3부 요인이 나누어 지명하도록 설계했습니다.
행정부: 대통령 지명 3인 – 입법부: 국회 선출 3인 – 사법부: 대법원장 지명 3인
표면적으로는 권력 분립과 견제장치가 완벽해 보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에서 이 구조는 심각한 맹점이 있습니다. 사법부의 대법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그리고, 국회 3인 중 여당 몫이 반드시 포함됩니다. 결과적으로 대통령과 여당이 마음만 먹으면 친정부 성향 위원이 과반(5~6명)을 차지하는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특히, 문재인 정부 시절 있었던 ‘조해주 상임위원 알박기 논란’은 선관위 중립성 훼손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선관위 상임위원은 비상임인 위원장을 대신해 사무처를 총괄하고 실질적인 의사결정을 주도하는 ‘실세 중의 실세’입니다. 관례적으로 정치적 색채가 옅은 인사가 맡아왔던 이 자리에, 대통령 선거 캠프 특보 출신인 조해주 위원이 임명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보는 특정 후보의 당선을 위해 뛰었던 한 팀의 선수가 옷만 갈아입고 심판이 된 격입니다. 이때, 선관위 직원들 조차 내부 게시판에 ‘선관위의 정치적 중립성이 무너졌다’라며, 집단 반발할 정도로 이 문제는 심각했습니다. 또한, 조해주는 임기 말 꼼수 사퇴 거부까지 했습니다. 그는 임기 말, 관례를 깨고 상임위원직만 내려놓은 채 비상임 위원직을 유지하려 시도했습니다. 이는 대선 관리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되었고, 전국의 선관위 직원들이 들고일어나는 사상 초유의 ‘항명 사태’를 불러왔습니다. 한 조직의 지도부가 정치적으로 오염된다면, 그 영향은 조직 전체로 퍼지게 됩니다. 직원들은 윗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이와 같은 현상은 지도부가 몸담고 있는 정권의 코드에 맞춰 유권해석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위원회가 여당 편인데, 우리가 소신껏 불법 선거 운동을 단속할 수 있겠습니까?”
한 일선 선관위 직원의 자조 섞인 탄식은, 헌법기관의 독립성이 어떻게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내렸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구조적인 불균형과 인사권자의 전횡이 만났을 때, 공정성은 설 자리를 잃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관위가 ‘심판’이 아닌 ‘플레이어’로 의심받게 된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이름의 비겁한 침묵
선관위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단연 ‘엄정 중립’입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이 단어는 권력의 눈치를 보기 위한 ‘면피용 방패’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앞서 언급한 ‘내로남불’ 현수막 불허 사태와 대조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TBS(교통방송)의 ‘#1(일) 합시다’ 캠페인입니다. 2020년 11월,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TBS는 “일(1)해야죠”, “일(1)은 합니다” 등의 문구와 함께 기호 1번(당시 여당)을 연상시키는 파란색 그래픽을 사용한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송출했습니다. 야당과 시민들은 즉각 반발했습니다.
“누가 봐도 기호 1번을 찍으라는 암시가 아닌가?”
“세금으로 운영되는 방송사가 특정 정당의 선거 운동을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지만 선관위의 초기 대응은 미온적이었습니다. “사전 선거 운동으로 보기 어렵다”며 자체 종결 처리를 시도했습니다. 야당의 항의와 언론의 비판이 거세지자 뒤늦게 “오해의 소지가 있다”며 경고 조치를 내렸지만, 이미 캠페인은 수없이 전파를 탄 뒤였습니다. 여기서 국민은 묻습니다. 시민단체의 현수막 속 ‘무능’이라는 단어는 “특정 정당을 유추할 수 있어서 불법”이라며 칼같이 막아선 선관위가, 왜 방송사의 노골적인 숫자 ‘1’ 마케팅 앞에서는 “종합적인 판단이 필요하다”며 주저했는가? 이 이중적인 태도는 선관위가 본인들의 방패막이로 삼았던 ‘정치적 중립’이 선택적임을 자인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중립’이 아닙니다. 강자의 편에 서서 약자의 입을 막는 ‘기울어진 침묵’일 뿐입니다. 선관위가 심판으로서의 권위를 스스로 갉아먹는 동안, 국민의 머릿속에는 “선관위는 여당 편”이라는 공식이 각인되기 시작했습니다.

무너진 내부 견제, “시키는 대로 하라”
역사적으로 하나의 조직 또는 국가가 썩어가며 무너질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징조 중 하나는 ‘내부 비판의 실종’입니다. 이는 선관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선관위 내부, 특히 일선 시·군·구 선관위 직원들 사이에서는 중앙위원회의 정치적 편향성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습니다. 익명 커뮤니티인 ‘블라인드’나 내부 게시판에는 자조 섞인 글들이 쏟아졌습니다.
“우리가 선거 관리하는 공무원인지, 여당 캠프 자원봉사자인지 모르겠다.”
“위에서 내려오는 지침이 법이랑 안 맞는데, 따지면 찍힌다.”
하지만 이러한 목소리는 철저히 묵살되었습니다. 상명하복의 경직된 조직 문화 속에서, 정치적으로 임명된 상임위원과 사무총장의 입김은 절대적이었습니다. 법리적 타당성보다 ‘윗선의 심기’가 우선시 되는 분위기가 정착되면서, 실무자들은 소극 행정으로 일관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국민들의 피로 쌓아올린 헌법이 부여한 ‘독립성’은 외부의 정치 권력이 선관위 수뇌부를 장악하고, 그 수뇌부가 다시 하부 조직을 통제하는 ‘하향식 오염’으로 선관위 전체로 퍼지게 된 것입니다. 심판이 경기장 안에서 경기 규칙을 지키는 것보다 구단주의 눈치를 살피는 데 급급하다면, 그 경기의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관위가 겪고 있는 도덕적 붕괴의 핵심입니다.

심판을 믿지 못하면, 스코어보드를 의심한다.
3부를 통해 우리는 선관위가 어떻게 정치적 중립성을 잃고 ‘기울어진 운동장의 심판’이 되었는지 목격했습니다. ‘특정 정권에 입맛에 맞는 잣대’, ‘권력자 캠프 출신 인산 알 박기로 얼룩진 편향된 인사’ 등 선관위가 그동안 해온 작태는 국민들에게 크나큰 경각심을 주었습니다.
“투표의 심판관은 공정하지 않다.”
“우리들의 피로 쓰여진 민주주의는 위태로운 상황이다.”
심판이 편파적이라고 믿는 순간, 관중은 더 이상 전광판의 점수를 믿지 않습니다. 심판이 특정 팀을 이기게 하기 위해 몰래 점수를 조작했을 것이라는 의구심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선거법 해석의 문제를 넘어, 이제 국민의 의심은 투표함과 개표기라는 ‘시스템’ 그 자체로 향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해석도 자기들 마음대로 하는데, 과연 투표지라고 손대지 않았을까?”
국민들이 가진 합리적인 의심은 기술적 결함 가능성과 맞물려 거대한 변화의 불씨가 됩니다. 4부에서는 선거 때마다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부정선거 의혹’의 실체를 파헤칩니다. 전자개표기 해킹설, 배춧잎 투표지, 그리고 사전투표 QR코드의 비밀. 과연 이것은 패배한 자들의 몽니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시스템의 치명적인 맹점일까요?
다음 4부, ‘끝나지 않는 부정선거 의혹 – 음모론인가, 시스템의 맹점인가?’에서 그 진실 공방의 현장으로 들어갑니다.


